[7월커버스토리#1] 장준하 선생님은 어쩌다 동해 산속 주차장에 덩그러니 있게 되었나?
- 백청안
- 2022년 5월 26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17일

(위클리강원=동해) 푸르른 바다와 시원한 산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동해시는 주말마다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그야말로 요즘 가장 트렌딩한 여행지 중 하나이다. 동해의 많은 동네 중에서도 특히 삼화동은 동해바다와 대비되는 산속 자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으로 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삼화에는 삼화사가 있는 두타산의 무릉계곡과, 다양한 액티비티가 즐비한 무릉별유천지가 대표적 관광지이다. 무릉별유천지는 쌍용C&E가 지난 40년간 석회석 채광지로 사용하던 곳을 재정비하여 만들었는데, 다양한 체험시설을 두 개의 에메랄드빛 호수 옆에서 즐길 수 있어 활동적인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 무릉별유천지]
무릉별유천지는 그 높은 인기 덕에 주차장도 무려 2개나 구비되어있다. 제2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삼화로 중앙도로를 달리다 옆길로 잠시 빠져 이기로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이 도로 끝에는 무릉별유천지 말고도 다른 중요한 장소가 숨겨져 있다. 거대한 무릉별유천지 관광팻말만 따라가다 보면 놓치기 쉽지만, 갈림길에서 이기동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이기로를 쭉 따라 들어가면 무릉별유천지 제2 주차장과 매우 대비되는 한 주차장이 나온다.
[사진: 이기로 갈림길]
산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이 뜬금없이 널따란 주차장 옆에는 공용화장실이 하나 있다. 이용객 하나 없는 신식 주차장과 화장실 옆 구석에는 두 개의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갈색 관광지 도로표지판이나, 그 흔한 설명문조차 찾을 수 없다. 이곳의 위치나 이것의 의미는 이기동에 사는 주민도 잘 모를 정도니 무릉별유천지만 들렀다 가는 관광객들을 탓할 순 없을 것이다. 새김글이 희미해져 가는 이 두 개의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백기완 선생이 만든 장준하 선생에(호칭?) 대한 시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지금 여기에 아무런 설명 없이 있는 것일까?
[사진: 경차 앞의 시비]
19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백기완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통일과 민주화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앞장선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김구의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또한, 1973년에는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 등 민주화 운동에도 힘을 보탰으며, 재야운동권을 대표하여 무소속으로 13대와 14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낙선 이후에는 본인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문제와 노동문제를 계속 연구하였다.
[사진: 장준하와 백기완 사진]
장준하는 그보다 14년 앞서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일본군에 입대하여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 배치되었다가, 1944년 광복군이 되기 위하여 그곳에서 탈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쓰촨성 충칭까지 7개월간 2,500km를 걸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1950년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에는 문교부에서 행정서기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1952년부터는 장준하의 대표업적이자 통일문제, 노동문제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에서부터 시와 소설의 문학작품까지 폭넓고 깊게 다룬 유의미한 근현대 출판물로 평가받는 월간지 <사상계>를 출판하였다. 1964년 장준하는 <사상계>와 함께 한일회담을 반대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그의 <사상계>도 탄압의 대상이 된다. <사상계>는 끝내 탄압으로 인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1970년 5월의 20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장준하는 그 이후에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벌이다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해 형집행정지가 되어 출감하였지만,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계곡 봉우리 절벽 아래에 떨어져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 죽음은 현재까지도 어긋난 진술 및 상흔으로 인해 원인이 정확히 규명되고 있지 못하다.
장준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백기완은 그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어떻게/왜)~하여 이 시비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립예정지였던 포천의 ~한 문제로 인하여 이곳 동해 산골짜기에 방치되게 되었다.
[통일문제연구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터뷰: 시비설립의 과정 및 비하인드 / 소유주 및 관리주체의 모호함 / 시비의 동해이동 이유]
문단1: 시비설립의 비하인드 스토리
문단1: 소유주 및 관리주체의 모호함.
문단1: 시비의 동해 이동 이유
이 시비는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무릉별유천지를 즐길 수 있게 해준 분을 기억하게 해주는 얼마 남지 않은 방법일지 모른다. 유명 관광지나 유적지로의 취급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관광지마다 숱하게 흩뿌려져 있는 동해시 홍보 팸플릿에 설명 한 줄은, 아니 안내판 정도는 있어도 될 것이다. 다행히, 아래 사진을 촬영한 이후에 관할 행정구역인 동해시에서는 비석 앞의 경차 주차구역 자리에 무언갈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 공사중 사진]
동해시 땡땡과 홍길동 과장은 5일 <위클리강원>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시비가 한동안 방치되어있었던 이유에 대해 “”라고 말하며, 앞으로는 “”한 계획으로 관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해시 담당자 인터뷰]
글/사진: 위클리강원 사회부 기자 백청안
report@weeklygangwon.com
* 아래에 <위클리강원>이 관리가 미비한 비석의 내용보존을 위해 작성한 시비의 전문을 첨부한다.
[시비전문]
오늘도 밤이슬
이렇게 흠빡 젖은건
외세의 반역이 내리친 벽을
새도록 까부신 피눈물인줄
왜들 모르나
벗이여 나의 비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해방 통일이라
이곳 땅밑에서도 이가갈리는
분단의 원흉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말라
하지만 통일은
딴데 있는게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 마디마디 박힌
분단의 독살 빼앗긴 자유
바로 그 싸움의 현장에서
통일을 찾으라
그리하여 쓰러진 전사는
무덤이 아니라
저 들판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잠들지 못하나니
벗이여 이물길 나는듯
봉우리마다 이어 붙여라
눈물도 한숨도
노여운 아우성으로
저 간악한 것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통일신바람
통일신바람으로 한꺼번에
한꺼번에 몰아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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